- 최연하 전시 큐레이터가 전하는 델피르와 친구들의 숨겨진 이야기 -

한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 사람들은 모두 특별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의 생각과 행동, 말투, 철학 등 사소한 모든 것에 주목한다. 지난해 12월,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개막한 ‘델피르와 친구들’ 사진전은 이처럼 사진계의 최고봉에 오른 거장들을 한 자리에서 경험할 수 있는 뜻 깊은 전시다. 그래서 오는 2월27일까지 예정된 장기간 전시에도 불구하고, 과거 매그넘 사진전과 스티븐 맥커리 특별전을 넘어서는 인기를 얻고 있다. 전시에는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로버트 프랭크, 요세프 코우델카, 사라 문, 윌리엄 클라인, 세바스치앙 살가두, 로베르 두아노, 헬무트 뉴턴, 자크 앙리 라르티크 등 그 이름만으로도 사진계의 역사가 된 세계 사진예술계의 거장들의 주옥같은 작품이 펼쳐지고 있다. 그러나 이 전시가 더 주목받는 이유는 이들 사진계 거장들을 만든 위대한 창조자 ‘로베르 델피르(Robert Delpire 1928~)’를 헌정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전시 기획자이자 영화 및 광고 제작자, 아트디렉터, 출판가로 명성이 높은 델피르는 지난 60년 동안 사진의 대중화에 힘쓰며 사진 역사에 남을 사진 서적과 전시를 기획한 최고 중의 최고로 평가받고 있다. 전시는 오는 2월27일까지 계속된다. - 편집자 주 -

▲ 성남훈 사진가가 델피르와 인터뷰하고 촬영한 사진, ⓒ성남훈, 파리 매그넘 갤러리에서, 2010년 10월

‘결정적 순간’의 대명사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과의 만남
프랑스 의사협회의 사진 전문지 ‘네프(Neuf)’를 편집하게 된 23살의 의학도 델피르는 보도사진가들의 단체인 매그넘(Magnum)에 찾아가 ‘당신들과 함께 멋진 의학 잡지를 만들고 싶다’고 제안한다. 매그넘 소속이었던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과 로버트 카파는 한 무명의 젊은이의 패기를 높이 사고 함께 일을 시작한다. 1950년, 이 일을 계기로 인생의 전환기를 맞게 된 델피르는 평생을 함께 보낸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과 인연을 맺게 된다. 그와 브레송은 기획자이자 사진가로 평생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간다. 실제로 델피르는 브레송의 15권의 사진집을 모두 기획했다. 또 대부분의 사진가들이 직접 사진집 편찬에 관여하는 것과 달리 브레송은 편집, 출력 등 모든 제작 업무를 델피르에게 일임했다. 전 세계를 순회해 높은 인기를 얻었던 브레송 회고전 역시 델피르가 진행했다. 그는 ‘브레송의 회고전이 평생에 가장 잘한 일’이라고 회상한 바 있다. 브레송을 대변하는 ‘결정적 순간’이란 말 역시, 델피르가 지난 1952년에 기획한 ‘Images a la Sauvette(사라져가는 이미지)’의 서문에 명시된 소제목 L’instant decisf가 영어판 으로 변역된 데서 유래했다.

▲ 델피르가 직접 사진집 제목을 지어준 박재승. 그는 델피르 출판사에서 책을 펴낸 유일한 한국인이다. ⓒJehsong Baak, Boy and girl running on sand dune, Holland, 2005

▲ 첫 출판된 로버트 프랭크의 ‘미국인들’사진집 표지(좌)와 델피르 출판사에서 복간한 ‘미국인들’(우)

로버트 프랭크, 요세프 코우델카와의 우정
스위스 출신의 로버트 프랭크(Robert Frank)는 구겐하임의 지원금을 마련하기 위해 약 1년간 미국 전역을 돌며 촬영한 사진으로 ‘미국인들’ 사진집을 펴냈다. 작가는 이 사진집에서 미국인들의 힘들고 거친 삶, 소외, 고독, 권태 등을 표현한다. 당시 미국 정부는 극적이고 절재된 완벽한 모습의 미국을 원했지만 프랭크의 사진은 미국의 절망, 침울함을 표현해 미국 사회에서 냉대를 받았다. 그런 로버트 프랭크의 사진을 가장 처음 알아 본 사람이 바로 델피르. 프랑스에서 최초로 프랭크의 사진을 전시한 델피르가 지난 1958년 펴낸 사진집 ‘미국인들’은 출간 1년도 채 되지 않아서 전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고, 프랭크를 세계적인 작가 반열에 올려놓았다. 이에 미국도 1년 후인 1959년 ‘미국인들’ 사진집을 출간한다.
한편, 요세프 코우델카도 델피르의 오래된 친구다. 한 일화에 의하면, 유럽 대륙을 돌며 사진을 찍던 코우델카는 델피르의 생일날 아침에 그를 찾아가 보드카 쇼를 하며 이색적인 시간을 보낸 것으로 알려질 만큼 그 둘의 우정은 각별했다.

이밖에도 델피르와 연관된 다양한 에피소드들은 <델피르와 친구들> 전시장에서 상영하는 ‘이미지 전달자, 델피르의 초상’ 영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금번 전시의 참여 작가 중 유일한 한국인 박재승에게 필름 1백 롤을 전해준 일, 사라 문(Sarah Moon)과의 사랑 및 공동 작업 등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로 구성된 이 영상은 델피르의 아내인 사라 문이 그를 헌정하기 위해 특별히 제작한 것이다.


▲ 사라 문이 감독한 ‘이미지 전달자, 델피르의 초상’영화의 스틸 컷, ⓒ사라 문Sarah Moon, 로베르 델피르의 초상

▲ 앙드레 잠스와 델피르가 만든 ‘포토 포슈 Photo Poche’ 시리즈 첫 번째 사진집으로 초기 초상사진의 대가 ‘나다르’의 사진집(좌)과 1999년 델피르가 편집한 요세프 코우델카의 카오스(우)

최연하 큐레이터에게 듣는‘델피르와 친구들’展 이야기
Q 이번 전시를 통해 사진 유저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것과 관전 포인트는 무엇인가?
A 사진 교과서에서나 볼 수 있었던 사진들이 눈앞에 펼쳐질 이번 전시는 니엡스, 다게르, 탈보트, 바이야르를 필두로 한 사진의 역사와 포토 포슈에 실렸던 사진작품부터 평소 만나고 싶었던 사진가들의 유명작품으로 구성된다. 지금처럼 사진의 생산자와 소비자가 많았던 때가 또 있었을까? 전시에는 세계적인 사진의 거장들을 만든 거장, 로베르 델피르의 사진 철학이 담겨있다. 델피르는 사진을 읽고, 보고, 전달할 때 무엇이 필요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말해준다. 전시장에 더 오래 머물수록 사진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Q 전시장에는 정말 많은 사진집이 있다. 이 중 눈여겨볼만한 서적이 있다면?
A 델피르 출판사가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출판한 박재승의 사진집을 추천하고 싶다. 박재승(Jehsong Baak, 1967~)의 사진 속 풍경은 고독하고 황량한 기운으로 가득하다. 한국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민을 간 그는 스무 살에 뉴욕에서 홀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서른한 살이 되던 해부터 지금까지 파리에서 사진가로서의 인생을 살고 있다. 따라서 그의 사진은 한국과 미국, 프랑스의 문화가 자연스럽게 혼재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인지 그 어디에도 안주하지 못한 체 표류하는 이방인의 시각을 엿볼 수 있다. 작가가 유럽의 여러 도시와 미국 등지로 목적 없이 떠난 여행길에서 만난 풍경과 사람들의 모습은 자유를 향한 작가의 욕망으로 채색된다. 그 여정에서 자신만의 진주를 사진으로 만들어내며 ‘여기 또는 그 어딘가’에도 속하지 않고 떠돌 수밖에 없는 사진가로서의 정체성을 보여준다.
델피르는 ‘책 디자인은 책 속 사진보다 흥미로워선 안 된다’고 했고, ‘사진 자체가 훌륭해서 특별한 디자인 없이도 작품이 홀로 설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박재승 사진집은 델피르의 그런 출판 미학이 담긴 책이다.

Q 이번 전시작 중 한국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것 중 눈여겨 볼만한 사진가는?
A 마이클 에커만, 마크 리부, 레몽 드파르동, 제인 에벌린 앳우드, 마르틴 프랭크, 앙드레 마르틴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많은 작가들이 전시에 참여하면서 상대적으로 전시 작품 수가 적지만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작가들이다.

Q 아를르 사진페스티벌에서 전시됐지만, 이번 한국 전시에서 소개되지 않은 작품이 있다면?
A ‘델피르와 친구들’ 사진전의 집중도를 높이기 위해 앙드레 프랑수아를 비롯한 일러스트레이터 작품들, 어린이 동화책을 배제했다. 기회가 된다면 천재 일러스트레이터 앙드레 프랑수아의 작품들을 한국에서 소개하고 싶다. 전체 조형예술에서 일러스트레이터 및 컴퓨터 그래픽 디자이너의 작업이 폄하되는 것을 안타까워했던 델피르는 일러스트레이터들의 작품들을 모두 전시했다. 프랑수아의 ‘악어의 눈물’이나, 허브 루발린의 캘리 그래피는 정말 아름답다.


취재 / 이효정 기자